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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화

일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극장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일본의 영화 전성기는 TV와 비디오가 급속도로 보급되기 전인 8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입니다. 일본 영화는 외화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도쿄에서도 주로 신쥬쿠와 히비야 쪽에 많은 개봉관이 몰려 있습니다. 일류 개봉관의 요금은 1,800엔 이상입니다.

개방적인 성 문화와 함께 3S (Screen / Sex / Sports) 산업이 번창일로에 있는 나라가 일본이라서, 2S가 결합한 다양한 형태의 소프트 포르노물 역시 일본 영화 산업의 특징입니다.

일본 영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초기 일본 영화는 전통극을 영상화한 것이 전부였으나, 1923년 도쿄 대지진 이후 근대적인 테마로 넘어왔습니다. 2,30년대에는 사무라이 영화가 대부분이였고, ㄱ주의와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정부의 권한이 강화되었을 때 영화는 정치 선전의 도구였고, 전쟁이 끝난 후 맹목적인 충성심이나 무술을 강조하는 봉건 시대적 영화가 연합군에 의해 금지되자 애니메이션이나 괴물 영화, 코메디 영화 등으로 방향이 전환되었습니다.

50년대에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라쇼몬> <7인의 사무라이> 등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후 일본 영화는 문화의 한 영역으로 인정 받게 됩니다.

7, 80년대에는 큰 프로덕션이 영향력을 잃은 데다가 새로운 독립 영화 제작에도 실패해서 국제 영화의 공격에 물러서게 됩니다. 그러나 요즘 다시 많은 독립 영화가 시도되고 있으며, 주노 이타미 감독 등의 작품이 국내에서도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일본의 축제 마쯔리

일본 사회를 특징 짓는 독특한 행사라면 두말할 필요없이 <마쯔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쯔리란 축제라는 뜻의 일본어입니다. 마쯔리는 일본인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매 절기마다 행해집니다. 전국의 크고 작은 마쯔리의 수를 모두 합친다면 일 년 내내 일본에서 마쯔리가 열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마쯔리는 종교 의식, 신사에서 종교적인 목적으로 치르던 행사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다가 근대화와 더불어 종교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시민들을 위한 일종의 축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에서 치르는 마쯔리는 대중적인 성격이 짙고, 거의 대부분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진행으로 이루어집니다.

일본에서 3대 마쯔리로 불리우는 8월 중순 교토에서 열리는 기온 마쯔리, 4월과 10월 다까야마에서 열리는 다까야마 마쯔리, 8월 중순 아오모리에서 개최되는 네부따 마쯔리가 유명합니다


일본의 전통예술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 문화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가부끼, 다도, 노가꾸, 라꾸고, 분라꾸 등으로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내용에 비해 형식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는 점입니다. 한 예로 다도에서는 차를 마시다는 행위 그 자체보다는 마시기 위해서 치르는 각종 예법을 가장 중요시합니다.

가부끼는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 가운데 첫째로 손꼽히는 것으로, 갖가지 화려한 의상과 분장으로 치장한 배우들이 가곡의 형식을 빌려 진행하는 모습에서 일본적인 색체가 강하게 풍깁니다. 17세기 중반 도꾸가와 바꾸후에서 여성의 출연을 제한하면서부터 가부끼에 등장하는 모든 역할을 남자들이 맡게 되었습니다.

노가꾸는 일본 전통 연극의 한 종류로 7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다찌가따라는 무용수와 하야시가따라는 악사들이 연기하는 이 가극은 신토를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목적에서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 농악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라꾸고는 한 명의 연기자가 나와서 관객들을 대상으로 우스갯 소리를 하는 것으로, 기모노를 입고 방석에 앉아서 진행합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모노 개그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라꾸는 일본의 전통 인형극으로 사람 키 반 정도 되는 정교하게 만든 인형을 세 사람이 나누어서 조종하며 인형극을 이끌어 갑니다. 전통 악기인 샤미센의 음률에 맞춰 진행하며, 인형의 정교한 몸놀림이 볼 만 합니다.


사무라이 문화

일본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무라이 (무사) 문화입니다. 사무라이 문화가 일본 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던 핵심 요소는 바로 닛뽄도로 대표되는 각 종 도검류입니다.

일본 도검의 유래는 기따 규슈의 야요이 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초기의 도검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이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도검 문화를 꽃 피우기 시작한 것은 헤이안 시대부터입니다. 특히 11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는 힘이 지배하던 약육강식의 시대로 많은 명검이 제작되었습니다.

섬세하면서 호전적인 일본 문화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도검류는 일본의 각 지방마다 하나씩 있는 성의 전시실이나 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성

일본에서 성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전후부터로, 초기에는 군사적인 목적에서 성을 쌓았습니다. 일본의 국내가 통일된 뒤에는 교통의 요지에 성이 세워지면서 권력의 상징으로 이용되었으며 성 둘레는 죠까마찌라고 하여 주요 번화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성은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하기 위해, 그리고 다이묘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둘레에 여러 겹의 호를 파고, 다양한 형태의 성벽으로 겹겹이 둘러싼 중심부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덴슈가꾸라는 높은 누각을 세운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근대 이전까지는 각 지방마다 독특한 양식의 성이 있었으나 근대화 초기인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로 접어들면서 봉건적 잔재를 없앤다고 144개 성 가운데 132개의 성이 철거되고,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재차 파괴되어 아직까지 원형을 그래도 유지하고 있는 성은 일본 전역에 12개밖에 안됩니다. 그 외의 성들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콘크리트로 재건한 것들입니다.

원형을 유지하는 성 - 히메지의 히메지성 / 이누야마의 이누야마성 / 마쯔모또의 마쯔모또 성


인공미의 정원

일본을 상징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상징물은 정원입니다. 전통 양식의 일본 정원은 인공미를 최대한 가미해서 만든 것으로, 자연 속에 어우러진 모습보다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각각의 사물을 정교하게 배치한 형태에 미의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원 조경의 목적은 한 풍경을 일정한 공간 안에 축소시켜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축소 지향적인 일본인의 문화적 습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일본 정원은 연못과 낮은 동산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쯔기야마 정원과 물이 없이 모래와 바위만으로 이루어진 가레산스이 정원으로 나뉩니다.

쯔기야마 정원의 특징은 시내와 연못에 둘러싸인 동산입니다. 산책로를 따라 걷거나 정원 가운데 있는 동산의 정상에 지은 정자에서 주위를 감상할 수 있게 하였으며, 정원을 구성하는 작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꾸몄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히로시마의 슛께이엔 / 가고시마의 이소떼이엔 / 구마모또의 스이젠지 등이 있습니다.

가레산스이는 정원의 일부를 바위와 모래만으로 구성하였고, 이랑을 이룬 모래는 강물 또는 바다의 물결을 , 바위는 폭포를 표현합니다. 이 정원은 자연과 우주를 최대한 한 곳으로 단순, 집약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일본 특유의 문화관의 단면을 보여주는 양식입니다.


일본의 전통 스포츠- 스모

일본의 국기인 스모는 형태와 규칙 등은 단순하지만 일본의 고유한 전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대 스모의 스타일은 에도 시대에 시작된 것이나 의례적인 스모는 그 전부터 신토 축제의 한 부분으로 계속해서 전해 내려왔고, 운동 경기 자체는 헤이안 시대 이후 사무라이가 결투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하였습니다.

스모 경기는 서로 부둥켜 안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벌린 손을 내려 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스모 기술은 70여 가지가 있습니다. 링은 신성한 그라운드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안에서 씨름꾼이 소금을 던지는 관습은 신토에서 몸을 정화하는 흔한 의식의 일종입니다. 또한 시합이 시작되기 전 손뼉을 치고, 발을 공중 높이 들어서 구르는 동작을 쉬코라고 합니다.

씨름꾼들이 몸에 걸치는 것은 허리에 두른 마와쉬라는 끈이 전부로 이 끈은 상대를 쥐어 잡는 기술에 있어서 핵심이 됩니다.

바소라고 불리는 스모 선수권 쟁탈전은 15일 동안이나 계속되며, 도쿄 (1, 5, 9월), 오사카 (3월), 나고야 (7월), 후쿠오카 (11월) 등의 도시에서 일 년에 여섯 번 열립니다. 요금은 1,200 엔.


일본의 현대 문화

일본의 현대 문학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해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지만, 사실 그들의 소설이 일본에서 많이 읽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포스트 모던류의 소설이 주류를 이끌고 있습니다.

무라카미 류의 <끝없는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 이어 다나카 야스오의 <어쩐지 크리스탈> 이후 일본 문학은 궤도를 벗어나 소비자의 수요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하나의 상품이 되고 있습니다.

요시모토 바나나 이후 일본에서 만화가가 그림을 못 그려 실패하면 소설가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일본의 의복

일본의 전통 의상은 세계적으로는 기모노로 불리고 일본 내에서는 고소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고소데는 소맷부리가 넓은 옛날 예복 밑에 있는 속옷이었는데, 나중에 속옷인 고소데가 겉옷으로 된 것입니다.

현재의 기모노는 모두 고소데로 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전통 의상은 같은 형의 의복을 겹쳐서 입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일본의 기원

  신화적 기원
" 일본 열도가 이자나기와 아자나미라는 부부이자 남매인 두 신의 포옹으로 생겨났다" 고 전해 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흡혈아가 태어났고 두 번째로 일련의 섬이 탄생되어 일본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두 신은 그 후 태양의 여신을 낳았는데, 이 여신이 일본 황족에게 황실의 징표로 구리 거울과 쇠 검, 보석을 하사했다 해서 일본인들은 황실의 직접적인 기원을 이 신들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역사적 기원
약 10만년 전 아이누족의 조상인 원시 인류가 동부 시베리아부터 지금의 사할린 섬과 일본 북부 지방으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이누족은 새로운 이주자들이 팽창과 군사적인 침략 때문에 북쪽 훗카이도로 내몰리고 지금의 몽고 인종이 들어 섰습니다.


조몽 문화와 야요이 문화

신석기 시대의 고고학적인 유물에는 1만년 이상된 토기도 포함되어 있는데 토기 형태에서 이름을 따와서 조몽 (새끼 줄무늬) 시대라고 합니다.

기원전 3세기 야요이 시대에 이르러서야 벼농사 기술과 도기 제작술, 관개 기술이 한반도에서 전래되어 야요이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야마토 시대

서기 1세기에 들어서 세력 있는 왕들과 계급적인 군부 사회가 봉기하였는데, 이 시대를 야마토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투구와 칼, 거울, 보석과 함께 고분들에 묻혔는데 수천 개의 고분군이 발견되었다 해서 이 시대를 고훈 시대라고도 합니다. 일본의 역사적인 제왕들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칼과 거울, < 마카타마 >라는 조각된 보석 등의 기원이 이 시대의 문화에 있다고 보입니다.

고분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황제 닌토쿠의 무덤입니다. 이것은 열쇠 구멍 모양의 섬인 사카이(간사이) 근처에 있습니다.

서기 5세기 경에 일본은 여러 부족들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그 중 가장 수가 많은 강력한 부족이 야마토였습니다. 자연 숭배를 기반으로 하는 다신교인 신토가 그 때 이미 나타나고 일본 왕조도 출현했습니다.

또한 이 때 한반도와 중국에서 선진 문화를 받아 들여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불교의 성상들은 6세기 때 한국으로부터 일본에 들어왔는데, 이는 왕실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신흥 종교의 옹호자들과 토착 종교인 신토를 고수하는 사람들 사이에 단기적인 내란도 있습니다.

불교가 우위에 올라선 것은 쇼토구 왕자가 불교를 확고히 제정하였던 593년부터이며, 그는 불교의 도덕 법전을 공포하고 여러 사원을 세웠고, 중국 예술과 학문을 증진시키면서 불교에 헌신하였습니다.


 나라 시대

나라 시대에 이르러 그 이전까지 천황이 바뀔 때마다 수도가 바뀌던 전통이 폐지되고 처음으로 항구적인 수도를 세웠습니다. 이 시대에는 비록 75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귀족 문화가 발달했고, 역사 편찬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국가의 보호 아래 불교가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일본이란 국호가 정식으로 사용되었고, 천황의 세력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중국의 후원 아래 나라는 문화적으로 융성했고, 일본 왕실은 사신들을 바다 건너로 보내 서적들과 정부의 학자들, 철학과 종교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중국의 수도인 장안의 광경과 거대한 규모에 압도당한 일본은 자신의 첫 수도인 나라를 중국의 수도 장안을 본보기로 설계하였습니다.


헤이안  시대

794년에 수도를 교토로 옮겨 헤이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수도 역시 중국을 모방해 세워졌습니다. 헤이안 시대는 궁정 문화가 꽃을 피우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작고 은둔된 사회에서 고전 일본 미술 시대를 이루었는데, 주요한 시집들과 문학 일기들이 이 시기에 쓰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의 딱딱한 문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어체의 일본어로 쓰인 헤이안 문학에서 여성들은 혁명적인 세력으로 등장했습니다. 일본의 모든 산문의 최고로 불리우는 < 겐지 이야기 >는 1000년경에 무라사키 시키부라는 황후의 시녀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때부터 여성들은 12겹으로 된 기모노를 입었는데, 색깔과 무늬에 따라 계층과 계절, 상황을 나타내었습니다.

헤이안 시대 말 수도와 궁정이 예술과 향락 추구에 여념이 없을 사이 천황의 권위는 약화되고 지방에서는 장원을 바탕으로 하는 호전적인 사무라이가 세력을 넓혀가게 됩니다.


가마쿠라 시대

가마쿠라로 시작되는 바쿠후 시대를 기점으로 일본은 고대 전제 군주제에서 중세적 봉건 제도로 넘어가게 됩니다. 일본의 무사도 정신이 확립된 것이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사무라이는 < 섬기는 사람 >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리모토가 가마쿠라에 세운 정부는 군주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개인의 윤리로 확립시켰습니다. 사무라이는 그의 칼로써 군주를 섬겼으며, 전쟁의 신인 하치마 뿐만 아니라 검에 대해서도 숭배했습니다. 명예를 보존하는 방법으로써 의식적으로 자살하는 관습인 할복 자살 (세푸코, 하라키리)도 이 시기에 유래되었습니다.

몽고의 침략이 규슈의 해안을 공격하던 때, 두 번에 걸쳐 몽고의 침략선을 난파시킨 살인적인 태풍을 가미가제 즉 < 신성한 바람 >이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의 역사는 천황과 쇼군의 자리다툼으로 이어집니다. 1332년 고다이고 천황은 천황의 직접 통치를 복원하려 했고, 강력한 군대의 저지와 여러 무사들의 배신으로 막부 정치는 전복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은 귀족과 승려들만 보호하고 무사 계급을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다이고 천황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장군들은 천황에게 수도를 떠날 것을 강요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

고다이고를 저지하기 위해 가마쿠라를 공격했다가 결국 고다이고를 추방하게 된 아쉬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무로마치 막부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는 56년간의 무정부 상태 동안 교토에 굳힌 힘을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했으나, 향락에 몰두하고 개인적인 이득만을 추구한 장군들이 행정을 장악해 버렸습니다.

무로마치 시대에 교토에서 꽃을 피운 예술은 오늘날 남아 있는 일본 전통 문화의 원류가 되었습니다. 중국과의 교역으로 단색 회화와 도자기가 들어왔고, 가마쿠라 시대에 선종교의 승려들이 최초로 관습화한 차마시기는 이 시대에 와서 그것과 관련된 예술품과 차, 다기들이 숭배되는 문화를 낳게 됩니다. 차노유라고 불리는 다도는 그 후 일본인의 취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막부 통치자인 요시마사 장군이 교외의 은신처에서 다도를 즐기는 동안 재 규합한 봉토의 또 다른 무리인 오닌워가 교토의 거리를 휩쓸고, 10년 동안의 싸움은 대규모의 파괴와 무질서를 낳게 됩니다.

이 혼돈의 시대에 세 명의 장군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들의 활동으로 일본은 단일 정부로 통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동맹자였지만 오다 노부나가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다른 두 가문을 이끌었습니다.


모모야마 시대

노부나가는 권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 그의 시종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그의 군 사령관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모모야마 시대가 열립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앙 집권화된 봉건 사회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그의 칙령 중 하나는 농부들이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고, 사무라이들도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무라이 계급은 소작농들로부터 분리되었고 검은 계급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중세의 다이묘 (세력 있는 토지 소유자)에 대한 소작농의 반란 가능성을 감소시켰습니다.

그는 중국을 정벌한다는 핑계로 1592년과 1597년 두 차례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 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에도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왕국을 짓기 위해 일생을 보내다가 상속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의 다섯 살난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로 하여금 섭정 5명의 보좌를 받게 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강력한 후원 세력을 얻어 1600년 세키가와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12년 동안 기다리던 패권의 꿈을 이루면서 에도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통치하던 25년간은 일본 역사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막부 정치는 에도 (현재의 도쿄)에 자리 잡았는데, 에도에서는 사, 농, 공, 상 (사무라이, 농부, 기능공, 상인)의 네 계급을 엄격히 조절하는 강력한 행정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이러한 사회 질서는 국가 강령으로 자리잡은 신유교주의의 철학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평화의 시대는 곧 번영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교대 시중 체제 ( 다이묘들이 반년 동안 에도의 소유지에 살게하고, 또한 그들의 가족들도 그곳에서 인질로 남게 하는 제도 )와 최 하층 계급인 상인에 의해 상업적인 제국이 세워졌으며, 그 중 여러 가계는 오늘날도 남아 있습니다.

상업적인 취향을 반영하는 연극, 문학, 음악, 미술의 대중 문화가 눈에 띄게 발전했습니다. 예술 활동의 장소는 우키요 (움직이는 시대)라고 불리는 인가된 매춘, 오락 지대에 있었고, 우상이 되었던 게이샤와 가부키 배우들은 우키요에 (움직이는 세계의 그림들)에서 지금까지도 존재합니다.


메이지 시대

1853년 미국 선박의 선장인 코모도르 페리는 우리가만에 닻은 내리고 일본에 교역항을 열 것을 요구했고, 막부 정권의 재정상의 궁핍과 약한 군사력 때문에 이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결국, 권좌에서 멀어지고 다른 사무라이들의 반란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은 사임하게 됩니다.

1868년 수도는 에도로 옮겨져 도쿄로 이름 붙여졌고 메이지 천황의 통치로 군주 정치가 복구되었지만, 배후에는 정치적 혁명을 주도한 이전의 사무라이 무리들이 정부를 움직이는 세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2년 후 사무라이 계층은 몰락하고, 다이묘가 토지를 다시 소유하게 됩니다. 항구들은 외국에 열렸으며, 일본 전역에서 유럽화 경향이 일어나게 됩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봉건 제도가 철폐되고, 문벌이 아니라 능력 본위로 구성되는 근대적 정부 기구가 세워졌습니다. 메이지 시대는 한마디로 열광적인 변화와 실험의 시대였습니다. <하이카> 라는 서양 양복을 입으며, 많은 사람들이 정부 정책에 따릅니다.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의 팽창에서 실마리를 얻어 해외 팽창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1895년 중일 전쟁에서 대만을 ,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사할린 남부 절반은 그리고 1910년 한국을 합병하게 됩니다.


다이쇼 시대

메이지 천황은 1912년 사망하고, 그의 아들 요시히토는 메이지와 같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24년간 군림했으나 정치와 공적인 업무로부터 거리를 두었고, 말년에는 정신병과 각종 질환으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군부는 계속해서 군대 팽창 정치를 밀고 나갔고, 일본 내에서는 잠시나마 의회 정치와 자유주의 물결이 일어납니다. 20대의 젊은이들은 재즈를 듣고, 찰리 채플린과 마르크스를 숭배했습니다. 또한 커피숍의 전신인 < 우유홀 >에서 우유와 와플을 즐기기도 합니다.


쇼와 시대

극단적인 군국주의자들은 아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더 깊은 전쟁의 늪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1932년 만주는 군사 규칙하에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군사 침략 때문에 유럽의 비난을 받자 다음 해 국제 연맹에서 탈퇴합니다.

1930년대에 일본과 중국과의 전쟁이 터진 1937년을 기점으로 군부는 점차 정부를 장악해 갑니다. 마침내 1941년 진주만의 미 해군 기지를 공격함으로써 일본은 제 2차 세계 대전에 뛰어 들었습니다.

1945년 8월 연합군에게 항복한 일본은 경제 규모를 줄이고, 천황은 자신의 신성을 포기하면서 새로운 헌법이 연합군의 지시하에 쓰여졌고 1952년까지 점령 상태는 계속됩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다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합니다. 50년대 말부터 노동 집약적인 산업으로 시작한 일본은 거대한 일본 경제의 신화를 만들게 됩니다.


헤이세이 시대

1898년 요시히토 천황의 사망 후 아키히토가 천황에 올라 헤이세이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요시히토 이후 천황에게 실질적인 권한은 없어졌지만, 천황은 여전히 상징적 원수이자 국민의 정신적 통합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아시아 동쪽에 위치한 섬나라로 수도는 도쿄(東京)이다. 일본 열도는 홋카이도(北海道)·혼슈(本州)·시코쿠(四國)·규슈(九州)등 4개의 큰 섬과 수많은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홋카이도를 포함한 4개의 큰 섬을 가리켜 일본 본토(日本本土)라고 한다. 지형적으로는 태평양상의 호상 열도로 활발한 지진 화산 활동 지역에 속해 있어 최근에도 크고 작은 지진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山地가 많은 편으로 국토의 약75%를 차지하고 있으며 산지 사이에는 작은 盆地나 퇴적물로 메워진 산간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일본 열도는 남북으로 길고 지형이 복잡하여 좁은 국토가 기후 경계선에 의해 둘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북부와 남부 ,동해 쪽과 태평양 쪽, 고원과 분지 등에 따른 기후 차이가 현저하다. 고도에 따른 기후 차이를 예로 들면 도쿄에서 북서쪽으로 약 기후 차이가 현저하다. 고도에 따른 기후 차이를 예로 들면 도쿄에서 북서쪽으로 약 150km에 있는 가루이자와(輕井澤 : 해발 약 1000m)는 고도가 높아 북쪽에 삿포로(札幌)와 기후가 같다. 그래서 가루이자와는 한여름인 7∼8월에 홋카이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 본토가 오가사와라(小笠原)기단에 덮혀 찌는 듯한 무더운 시기에 피서지로 많이 애용되고 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샐활해 본 사람은 일본이 비가 자주 내리고 여름에 태풍이 자주 발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남쪽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고온 다습한 기류인 남동 계절풍이 일본 부근의 저기압,전선,태풍 활동과 연결되어 많은 양의 비를 몰고 오기 때문에 세계적인 多雨 국가 중의 하나이다. 태풍 외에도 온대성 저기압이나 전선에 의한 재해가 있는데, 특히 6∼7월에 일어나는 장마(梅雨) 전선에 의한 집중 호우의 재해가 크다. 또한 겨울에 혼슈는 척량 산맥을 경계로 태평양 쪽은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데 반해, 동해 쪽은 눈이 많이 내리는 등 기상 재해가 빈번하여 국민의 생활과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